어렸을 때 보았던 서부극의 주제는 대부분 권선징악이다. 뻔한 내용인데도 손에 땀을 쥔 채 영화를 본다. 흥미로운 사실은 주인공은 언제나 흰색 조끼를 입은 오른손잡이 총잡이인 반면 악당은 항상 검은색 조끼를 입은 쌍권총의 사나이이다. 또 주인공은 백마를, 악당은 언제나 흑마를 탔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이렇게 쉬웠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선과 악의 구별이 서부영화같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실상 간첩은 가장 간첩처럼 생기지 않았다던가?
열왕기상 1장은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이야기이다. 노리의 다윗은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듯하지 않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아리따운 수처녀였다면 다윗의 증상은 그저 순환계의 노화로 인한 수족의 냉증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고대인들의 마음에 국가의 운명과 국왕의 정력은 정비례한다. 아버지의 정권을 찬탈한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다윗 궁 지붕에 천막을 치고 은밀해야 할 작업(?)을 공개적으로 저지른다. 정욕 때문이 아니라 정권욕 때문이다. 자신의 정력이 국운을 상승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음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반면 다윗은 아비삭과 동침할 의도 조차 없다. 틀림없이 국가의 기운은 쇠하고 있다. 다윗의 신하들도 염려에 사로잡힌다. 국가와 국왕의 미래에 대한 순수한 걱정만이 아니다. 왕의 쇠퇴와 함께 사라질 자신의 권력에 대한 염려가 더 컸을 수도 있다.
권력후계 서열 1위였던 아도니야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어느 날 자신의 집에서 특별한 모임을 개최하면서 그는 왕자들과 최고위공무원들을 초청한다. 초청자 명단에는 군을 장악하고 있는 요압과 종교 (정신세계) 를 장악하고 있는 아비아달까지 포함되었다. 군과 종교는 언제나 보수적이다. 기득권자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은 모임이 정점에 이르자 아도니야를 왕으로 선포했다. 보수세력의 궐기이다. 이를 진보세력이 간과 할 리 없다.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계교’ (왕상 1:12) 를 베푼다. 선지자의 지시를 따라 밧세바는 다윗의 마음을 교란한다. 왕의 기운이 쇠한 사이 보수세력의 비호 하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보고한다. 그 결과 왕의 사후, 자신과 솔로몬의 생명이 위태하다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밧세바의 전제이다. “저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계집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 . .” (왕상 1:17). 다윗이 정말 이런 약속을 했는지 독자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성경의 독자들은 이 시점까지 이런 약속에 대해 읽은 적이 없다. 이때 나단이 질풍처럼 등장한다. 노리의 다윗에게 기억을 되살릴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밧세바의 말을 강화한다. 이제 다윗은 깊이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다수가 주장하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 주장은 팩트가 된다. 다윗은 솔로몬의 대관식을 명령한다. 솔로몬의 등극이다. 제사장 사독, 선지자 나단,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일등 공신이다. 진보 세력에게 기회가 왔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제사장 사독이 솔로몬에게 기름 붓는다면 왕위 계승의 영적, 정신적 정당성은 확보된다. 선지자는 언제나 급진적 메시지로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브나야 (대상 27:5-6)는 다윗 군대의 용사로 요압의 명령을 받들었던 지휘관이 아니던가? 요압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포부를 따라 이상형의 군대를 만들어갈 능력과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개혁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도래가 눈 앞에 다가왔다. 진보세력은 미소짓는다.
흥미로운 사건은 이것이다. 이런 궁정 음모를 통해 정권을 잡은 솔로몬, 비록 자신이 왕이 되었건만 오직 솔로몬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본문을 통해 독자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면 이 일의 전개는 솔로몬의 의지와는 관계없어 보인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수된 자료만이 이 사건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보수세력의 위기이다. 요압은 성역으로 도망하였으나 권력은 반역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그 반역자가 군을 장악하고 있다면 절대로 그에게 관용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오판에 대한 댓가로 생명을 내어 놓아야 했다. 물리적 파워를 소유하지 않은 정신적 지도자를 함부로 제거 했다간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는 죽음 대신 귀향의 옵션이 주어진다. 그러나 권력자는 절대 그를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계를 떠나는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은 몇 번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그때 마다 복귀하여 급기야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거짓말 장이”라는 비평을 이렇게 받았다. “나는 한번도 거짓말 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상황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순간에도 아도니야는 정계 복귀를 위한 꼼수를 부린다. 은퇴 조건으로 아비삭을 달라는 것이다. 선왕의 후궁을 아내로 맞아 자신에게 얼마나 정력이 넘치는지를 과시한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때 자신이 정통성을 갖은 권력의 후계자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정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에게 이정도의 꼼수는 불 보듯 훤히 보인다. 아도니야도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다. 드디어 진보세력 중심의 솔로몬 내각이 구성되었다 (왕하 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의 탄생 뒤에는 권력을 중심으로 긴박한 정치적 줄다리기가 있어왔다. 솔로몬의 등극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 다이나믹을 무시한 채 단순히 다윗이 약속한대로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지극히 단조로운 성경독법이다. 이렇게 단면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해석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이렇게 단순하게 조직을 이해한다면 리더십 개발도 필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음모와 흉계 속에서도 신비롭게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아니 정의를 위해 싸우는 흰색 조끼의 총잡이도 계교를 부리며 자신의 에젠다를 가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탄핵의 위기 앞에 놓여있다. 박 대통령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변에는 복잡 다단한 권력 음모가 있었지만 왠일인지 대통령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댓가는 너무나 통렬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도 이런 음모와 개인적 어젠다가 있다는 사실이다. 목회자의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주님과 교회를 향한 헌신과 아울러 지극히 인간적인 어젠다도 숨어있다. 이 민감한 다이나믹을 검은 조끼와 흰 조끼로 단순화 할 수는 없다. 검은 조끼를 입은 옳은 자도, 흰 조끼를 입은 음흉한 자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는 조직과 조직원의 현상태를 볼 수 있는 탁월한 분별력을 가져야한다. 분별하여 바로잡아가지 않으면 개인과 당파의 어젠다가 조직을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