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이 설교라는 “도구” 를 이용해 자신의 반대자를 공격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목회자들이 정말 그렇게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행여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강단에서 특정인을 공격하기 이전 설교자가 분별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강단에서 특정인을 한대 때린 후 강단에서 내려와 열대 맞는다면 내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12지파 동맹체를 뛰어넘어 통일국가를 이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그의 뒤를 이은 다윗은 사울의 왕국보다 훨씬 강력한 제국을 세웠으며 솔로몬은 다윗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이루었다 (왕상 4:1-6; 5:13). 솔로몬의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왕상 11:43).
르호보암의 대관식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는 왜 자신의 대관식을 예루살렘이 아닌 세겜에서 진행해야 했는가 (왕하12:1)? 당시 통일왕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정신적 수도였다. 세겜 역시 족장들의 전승이 얽힌 주요 성지 (창12:6; 33:18-20; 수24:32) 였으나 북조 이스라엘 땅에 위치해 있다. 르호보암은 남조 유다지파 출신이다. 지정학적으로 그의 지지자들은 남쪽에 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비록 이스라엘이 통일왕국으로 통합되었으나 북부의 10 지파와 유다지파는 정신적,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이 없다. 남조와 북조 사이에는 아직 정치적, 정신적 불신과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삼하 19:41 참조). 이런 정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유다지파의 리더가 왕으로 등극했다면 당연히 북부 10지파의 정치적 인정을 받아야만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이미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정신적 성지 세겜에서 왕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때의 정치상황이 이러했다.
르호보암의 할아버지 다윗 시절의 정치상황을 어떠했는가? 다윗의 정적 사울이 전사한 이후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족속의 왕이 되었다 (삼하 2:4). 그러나 북부 지파들은 아직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의 정통성은 오히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있었다. 다윗 가문과 사울 가문의 전쟁은 사실 정치적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지파들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암살 이후 상황은 급변하였다. 이제는 북부 이스라엘 지파들 조차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였다 (삼하 5:1-3). 다윗의 정치적 분별력은 탁월했다. 그가 북부지파 장로들의 정치적 인정을 받은 이후 족장들의 전승이 얽혀있는 땅 세겜을 수도로 정하여 정치를 시작하였다면 그를 후원했던 유다지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에게 등을 돌렸을수도 있다. 다윗이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헤브론을 통일국가의 수도로 정해 그곳에서 정치를 계속했다면 위기의식에 빠진 이스라엘은 다윗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수도 있다.
다윗은 팔레스타인 땅 북부와 남부의 중간지점, 아직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했던 여부스 사람의 철옹성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다윗왕조의 수도로 삼았다 (삼하 5:6-10). 이 성은 이스라엘의 영지도, 유다의 고토도 아니다. 정치적 중립지역이다. 오히려 다윗이 여부스에게서 빼앗은 다윗의 개인성 일 뿐이다. 이곳에 법궤가 들어왔을 때 다윗은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입성이라는 종교적 의미 이상이다. 정치가인 다윗에게 법궤의 입성은 결정적인 정치적 승리를 의미한다. 다윗 성은 이제 하나님이 임재한 도시가 되었다. 다윗 정권의 정통성이 이렇게 완성되었다. 다윗 생애에 가장 기쁜 날이다. 필요없는 노출 조차 망각한 채 감격에 젖어 춤을 추던 왕에게 날카로운 언어의 비수를 던진 사람이 다름 아닌 사울의 딸미갈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건을 가장한 당신의 춤 속에서 나는 비정한 정치인을 봅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의 자리를 찬탄했을 뿐입니다!”
과연 다윗이 사울을 두번이나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을까? 한 번은 굴 속에서 사울이 은밀하게 용변을 보고 있었다. 또 한 번은 사울이 자신의 켐프에서 꿀 잠을 자고 있었다. 다윗의 신복들은 두 번 다 동일하게 외쳤다. “기회는 이때입니다. 단 칼에 끝장을 내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상황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가 만일 용변을 보고 있는 정적을 뒤에서 찔러 죽였다면 유다지파와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있는 정적을 살해한다면 이것은 정치적 자살이다. 무장하지 않은 적을 죽이는 것은 다윗 스스로 자신이 일국의 군왕이 될 그릇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다시말해 다윗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단숨에 통일왕국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윗이 가진 분별력은 다윗으로 하여금 냉엄한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아량을 만 천하에 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쳐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 를 조용히 넘기는 대신 크게 외쳤다. “왕이여 들으십시오. 내가 당신을 단 칼에 죽여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당신을 그렇게 죽이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나는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이 외침은 다윗이 사울에게 은밀하게 보내었던 개인적 메시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리더들을 향하여 외쳤던 공개적 메시지이다.
강단에서 한대 때린 후 내려와서 열대 맞는다면 리더의 분별력은 어디에 있는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다면 리더가 아니다. 사람과 조직을 리드하기 위해 우리는 시세를 보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잇사갈 자손 중에게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 (대상 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