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간의 마음은 지정의 (知情意) 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감정일 것이다. 누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이라고 했던가? 인간이 행동하기 전에 심사숙고 한다면 많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사고하기 보다 감정에 이끌려 오판하며 이를 행동에 옮기고는 후회한다. 성경의 주해자는 뜨거운 확신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기 보다 냉철한 사고를 가지고 해석에 임해야한다. 리더라면 감정에 이끌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레위기 19장에는 레위 사람과 그의 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람의 첩이 ‘행음’ 하고는 (남편의 분을 피해?) 친정 아버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넉 달을 보내었다 (19:2). 이에 남편은 이 여자를 용서하고 (3절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장인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위의 그림은 당시 히브리 사회의 전반적 사회상과 일맥상통하지 않는다. 창38:24에서 유다는 과부가 된 자신의 며느리 타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하여 그를 태워죽이려고 했다. 레20:10은 불륜을 저지른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위인 첩의 아버지는 ‘행음’한 딸을 넉달간 보호했다. 이 두가지의 상반된 그림은 단지 시아버지와 친정 아버지의 차이일 뿐인가?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도 일반인은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을 가르치다” 와 “성경 공부를 가리키다” 는 엄연하게 다른 말이며 후자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가지 표현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 중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특정 단어를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이것” 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단어가 그 의미 이외의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여기 ‘행음’ 했다고 변역된 히브리어 <자나> 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분노하다,” “증오하다” 라는 뜻이다. 레위 사람의 첩은 (남편과의 다툼 이후?) “분노” 하여 친정으로 갔고 남편은 그를 달래어 (3 절 “다정하게 말하고”) 집에 데려오기 위해 처가에 간 것이 옳바른 번역이다. 첩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는 자신의 첩이 밤새 강간당하도록 폭도들에게 내어주고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다. 어쩌면 남편의 이와같은 이기심을 진작에 보았던 이 여자는 남편에게 분노하여 남편을 떠났을 수도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행음하다” 와 “분노하다” 라는 개념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분노가 갖은 위험을 순결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위험과 동일선상에서 보았을 수 있다. 둘 다 되돌릴 수 없이 파괴적이다. 고대 히브리사회에서 행음은 가정과 사회를 파괴할 뿐 아니라 목숨 조차 내어놓아야하는 치명적 행위이다. 리더가 쉽게 분노한다면 그가 이끄는 조직은 파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리더 자신도 리더십을 잃어버릴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무리들로 부터 그레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리더를 세울 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급히 분내지” 아니하는 성품의 소유자를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딛 1:7). 진정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리더)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 (리더)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잠 16:32). 총회는 리더를 세우는 자리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리더가 자신의 조직을 이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