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수이 (Ham Suey) 목사는 캄보디아 벤티미안체 주의 목회자 연합회 회장이다. 내가 만난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다. 벤티미안체 목회자 연합회가 DCMi를 초청하여 전도대회를 개회하기로 결정했을 때 함 수이 목사는 목회자 연합회의 리더들을 향해 조용하고 따듯하게 권면하였다. 권면 내내 그는 한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어찌보면 지극히 밋밋한 권면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목회자 협의회 회원들은 이분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익숙하지 않은 그룹에서 리더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룹으로 대화해보면 쉽게 들어난다. 리더가 말할 때 사람들은 경청한다.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가 리더이다.
캄보디아 내전 중 함 수이 목사는 캄보디아 정부군의 일원으로 반군과 전쟁을 했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베트남의 침공으로 캄보디아 내전이 종료 되어서야 그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현역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총과 실탄을 집에 가져와 보관하였다. 전쟁의 망령이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의 영혼에 예수가 들어갈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3년에 걸친 반복적인 거부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그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나눈 한 사람의 목회자로 인해 함 수이는 기독교에 입문했고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교회생활 초기 그는 교회가 자신에게 경제적 혜택을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 교회가 전혀 자신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전도 지역의 교회라면 교회 조차도 누군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겠는가? 교회에 실망(?)한 그는 결국 신앙과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 무렵 4살 된 자신의 막내 딸이 심각한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의사의 말로는 유전적 질병이란다. 치료는 가능하나 의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가족회의를 걸쳐 경제적 여유가 있는 큰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큰 아버지의 대답은 No. 조상 내내 믿었던 불교를 떠나 기독교에 입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동일한 이유로 자신의 형제들 역시 돕기를 거절했다. 아내의 성화는 매일 같이 심해졌다. 이제는 정말 교회를 떠날 때가 되었다. 그 순간 그의 영혼 속에 성경구절 하나가 떠 올랐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는 이렇게 되뇌었다. “주님,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시고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당신의 것이라면 죽어가는 제 딸이 저를 향해 “아빠”라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왠일인가? 며칠 동안 눈도 뜨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던 딸 아이가 가까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빠!” 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또 되뇌었다.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제 딸아이가 물 좀 달라가 말하게 해 주십시오.” 연이어 딸이 말했다. “물 좀 주세요, 아빠. 목이 너무 말라요.” 신비감과 두려움에 사로 잡힌 채 함수이는 한번 더 되뇌었다. “주님,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딸이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딸이 말했다. “아빠, 먹을 것 좀 주세요. 배고파요.”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부터 딸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결국 수술도, 약도, 병원도 거치지 않은 채 주님은 함 수이의 딸을 병상에서 일으키셨다. 함 수이와 그의 아내는 이제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캄보디아의 벤티미안체 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일 뿐 아니라 교회의 담을 넘어 지역주민이 존경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벤티미안체 주에서 수시로 주지사를 만나 정부와 교회를 연결하는 영향력 있는 가교이다. 나를 앞 자리에 앉혀 둔 채 그는 목회자 연합회 회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감사하게도 벤티미안체 주의 교회들은 이미 교단의 벽을 넘어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님 나라가 이곳에 강력하게 임할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지난 봄 정 목사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그가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직관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틀 전 저는 제 인생 처음으로 그 외국인을 영접하기 위해 두 시간 떨어진 공항에 갔었고 정 목사를 픽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회의를 걸쳐 전도대회를 유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번 대회에 적극 참여하여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입니다.” 장내에는 뜨거운 아멘과 열화 같은 박수가 넘쳤다. 나의 마음에는 감격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교회가 존재하나 그 힘이 지극히 미약한 미전도 지역에서 한 도시의 모든 교회를 연합하여 복음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특권은 주님이 DCMi 에 주신 은혜이다. 이 은혜로 인해 내 영혼은 감격한다. 그러나 이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제공하는 자원이 오히려 선교지의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역량을 제한 할까 봐 언제나 두렵다. 얼마만큼 지원하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사이언스가 아닌 아트이다. 인문학적 역랑이 없이는 도저히 계산 할 수 없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