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히 Youtube 를 통해 몇몇 새터민들의 간증을 들었다. 탈북의 험란한 과정을 걸쳐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통적으로 그들의 심금을 울렸던 한가지는 그들을 영접하는 국정원 직원의 따듯한 말 한마디였다. “어서오십시오. 대한민국에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마음을 다해 환영합니다.” 이 말을 듣고 감격하지 않은 탈북자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을 한결 같이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는 절대로 우리같은 하층민은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우리의 가슴 속에 있었던 “행여 남한에서도”하는 두려움은 눈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목숨을 내어놓고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까지 와야 했던 이유를 순식간에 발견했습니다. 대한민국이야 말로 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살아야 할 나의 조국이라는 것이 너무도 확실해졌습니다.” 첫 인상은 영원히 가는 인상이다. 이들은 조국 대한민국이 자신들을 존중한다는 강렬한 첫 인상 이후 이들의 나머지 생애를 애국자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충성한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조차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따르게 되어 있다. 타인으로 부터 존중받는 최상의 방법은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리더라면 마땅히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존중해야한다. 타인이 나의 마음을 100% 이해할 것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의 마음을 100% 알아 내 입의 혀와 같이 움직여 줄 수 있을것인가? 동역의 첫 걸음은 존중이다. 서로가 갖은 현저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단 서로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잇따른 증언이다. “우리를 이렇게 따듯하게 맞이해 준 국정원 선생님들은 국정원에 도착하기까지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로 우리를 통솔했으며 그들의 카리스마를 통해 대한민국은 결코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카리스마가 이제 막 탈북하여 가까스로 한국에 도착한 탈북민들에게 공포를 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참으로 잘 왔다는 안정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국정원 요원들에게 따듯함이 없었다면 결코 탈북자들의 마음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들에게 준엄한 통솔력이 없었다면 북한 국경수비대의 공포와 중국 공안의 위협을 모두 이기고 한국까지 왔던 새터민들은 질서를 잃어버린 채 국정원 요원들을 가지고 놀려고 했을 것이다. 행여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탈북민들에 대한 조사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북한은 탈북민의 유입을 본격적인 간첩 유입의 기회로 악용하였을 것이다. 이때 가장 손해를 보는 측은 새터민 자신들이며 대한민국이다.
타인을 존중하라는 말은 ‘무골 호인’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무골 호인은 결코 리더가 될 수 없다. “No!” 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선을 그을 수 있는 비정함이 없다면 결코 조직을 이끌고 갈 수 없다. 김봉준은 자신의 저서 리더십에서 리더가 필히 가져야 필수자질로 “비정과 온정”의 융합을 말한다.
물리적으로 얼음과 불을 한 용기 속에 담을 수 없다. 얼음이 녹거나 불이 꺼지거나 둘 가운데 한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인간성의 문제라고 본다. 한 사람의 리더가 가슴을 녹이는 온정 (인정)과 서리발 같은 냉혹함을 동시에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상충하고 상반되는 요소를 함께 지니는 것이야말로 리더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다.”
읍참마속 (泣斬馬謖),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은 가장 사랑하는 부하 마속이지만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을 때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그의 목을 벤 이후 그 자리에서 엎드려 통곡한 제갈공명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잔혹한 독재자이거나 무능한 무골호인일 뿐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의 목표에 충성하게하는 효과적 리더는 아닐 것이다. 20여년전 John Maxwell 의 리더십 칸퍼런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려면 공을 남긴자에게 상을 주어야 하며 과를 남긴자를 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공을 남긴자에게 상을 주는 대신 하나님를 찬양하고, 과를 남긴자를 적절하게 벌하는 대신 괜찮다고 말하고 넘어갑니다. 교회의 사역이 갈수록 약해지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