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변화와 이를 수반한 초자연적 현상들은 이때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울수 없는 교훈을 주었다. 이 교훈은 오랜 시간에 걸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의 두뇌에 인식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 경혐을 통해 이들의 영혼에 각인되었다. 우리의 제자훈련 결과가 이런식이라면 제자훈련이 제자를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은 일순간에 불식될 것이다.
만일 영적 지도자인 우리에게 이런 트랜스포메이션이 가시적으로 일어난다면 교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만일 이런 트랜스포메이션이 교인들에게 일어난다면 전도가 어렵다는 것은 가설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적 리더인 우리에게 변화산 사건처럼 매력적인 트랜스포메이션 모델은 없다.
이 사건은 마17:1-8; 막9:2-8; 눅9:28-36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건을 “변화산 사건” 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중 대부분은 이렇게 이해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마태와 마가의 눈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 . .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 . 변형되사 . . . 광채가 나며” (마17:1-2; 막 9:28-36). 그러나 인체 해부학을 공부한 의사의 직업병(?) 인지 누가는 좀 더 분석적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 . . 광채가 나더라” (눅9:28-29). 누가의 안목에 이 사건은 변화산 사건이 아닌 산기도 사건이었다. 그렇다, 예수는 변화하려고 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고 그 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기도의 열매는 우리가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에서 일어난 엄청난 영적 현상이었다.
예수가 침례를 받았을 때 나타났던 영적 현상들은 어떠했는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했다. 여기에 더해 예수가 누구인지 하늘의 음성이 확증해 주었다. 이 역시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마3:16; 막 1:10)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좀 더 분석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 . . 강림하시더니 하늘로 부터 소리가 나기를 . . . ” (눅3:21-22). 이 사건 역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지 기독교 리더십이 아니라 할찌라도 리더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적, 정신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면 사람을 통솔하고 조직을 이끌고 가는 것은 어려워진다. 카리스마를 추구하는 리더십은 유치할 수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가 없는 리더는 리드할 수 없다. 섬기는 리더십과 카리스마 리더십은 상충하지 않는다. 리더라면 예외없이 높은 자리에서 대우를 받는 조직의 생리를 거부한채 리더가 스스로 낮은 곳에 내려가 조직원을 섬긴다면 그것 처럼 리더의 카리스마를 세워주는 사건도 없다. 누가의 통찰력에서 영적 리더십을 배우라. 기도하지 않는 리더는 결코 탁월한 영성으로 사람을 리드할 수 없다. 영적 변화산을 리더의 삶과 사역 한 복판에 가져오려면 리더는 주님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리더가 기도의 사람이 되려면 리더는 주간 스케줄을 다시 만들어야한다. 거의 모든 미팅을 켄슬하라. 대신 주님과의 교제를 최우선 과제로 만들라.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자는 ‘만물박사’이지 리더가 아니다. 영적리더의 최우선 과제는 주님을 심도 깊게 만나는 것이다. 나아가 기도의 산에서 경험한 환희에 취해 산에만 거주하려는 한다면 ‘산신령’이 될 수는 있을지모르나 리더는 아니다. 가장 강력한 영적 리더는 산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를 체험한 이후 산에 머무는 대신 다시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를 지는 리더이다. 리더가 이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리더는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