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튀르키예 지진, 상상치도 못한 켈리포니아 폭설, 미국을 얼어붙게 만든 강추위등 우리가 사는 지구의 자연환경이 심상치 않다. 나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핵문제, 미중간의 군사적 갈등등 세계의 정치적 지형에도 동서냉전때와 버금가는 긴장감이 감돈다. 브레이크가 없이 이대로 간다면 인류파멸의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어느때 보다 절실하게 인류를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선조들이 인류의 원역사에 초래한 하나님과의 분열을 믿음과 순종으로 역전시켜 다시 한번 하나님과 인류를 화목하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태초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의 구조는 창1-11장에 나타난 인류의 원역사에서 인류가 하나님께 저항하고 배역한 4가지 사건들을–에덴동산 사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 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아브라함이 어떻게 역전시켜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에덴동산의 주인공 아담은 동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리하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하나 만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배도했다. 그 결과는 아담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죄와 죽음이라는 암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다. 부족사회에 살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다는 것은 자신의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서 완전히 자신의 뿌리를 뽑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그의 시큐리티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명령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 아담과는 달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던져버렸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은 형제살인이었다. 사실 인간관계 갈등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 아닌 종종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간에 일어난다. 가족간의 종교적인 갈등은 형제살인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족 갈등을 역전시킨 드라마는 통쾌하기 짝이없다. 자신의 소유와 조카 롯의 소유가 제한 된 땅에서 계속 번성하여 결국 가족갈등의 불씨가 되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우선권 양보하였다. 가인의 실패로 하마터면 인류에게 주어지지 못했을 뻔 했던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의 관대함으로 인해 다시 인류에게 주어질 바탕이 마련되었다.
홍수 사건은 인류의 죄와 악이 극에 이르러서 발생한 사건이다.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신다–내가 홍수를 일으켜서 모든 생명체를 죽일 것이다. 너는 어서 방주를 만들어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라. 창6:22은 노아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흥미롭게도 노아의 순종이 가져 온 결과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인류 전체의 멸망이다.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성경해석인 미드라시는 홍수 사건 이후 노아와 하나님의 대화를 상상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아닌 성경에 대한 고대인의 해석이며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노아가 하나님께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 당신은 우주의 주인이시며 자애로운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자비를 보이 셨어야만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여 가라사대, “너 어리석은 노아여, 이제야 네가 말을 하는구나. 내가 너에게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겠다고 말했을 때 너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방주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었지. 그때 내가 너에게 기대했던 것은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다. 너는 고작 너 자신을 위해 방주를 만들었을 뿐 전 인류가 멸망한 다음 이제서야 입을 열어 간구하는 구나.”
고대 유대인 랍비의 눈에 들어 온 노아의 순종은 얼음장 처럼 차가운 비정한 순종이었을 뿐 슬프게도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보려는 중보의 노력이 부재했다. 그 결과 비록 홍수 심판에서 생명을 건졌으나 노아와 노아의 자손들은 계속 죄를 짓는 삶을 살았으며 결국 바벨 탑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노아의 홍수가 죄지은 인간은 휩쓸었지만 홍수 이후에도 죄의 근원지인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사악하게 보존되고 있다. 미드라시의 해석이 정석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로버트나 컴퓨터 처럼 인간미를 저버린 채 기계적인 순종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격과 열정을 다해 책임있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땀과 눈물이 섞인 중보기도이다. 아쉽게도 노아는 멸망하는 인류를 멀찍이서 바라 본 비겁한 방관자였을 뿐 하나님의 자비를 이땅에 불러온 기도의 용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의 주인공 아브라함은 달랐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인류를 향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연민과 애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감히 이렇게 반박한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 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이까” (18:25). 한글 성경의 번역은 너무나 신사적이다.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 아브라함의 불경에 가까운 절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하나님,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비열한 짓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취급 하심은 정말이지 야비한 행위입니다, 하나님!” 감히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본 적이 있는가? 아브라함의 절규에는 하나님의 명예와 품위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는 경건함이 있다. “하나님,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당신의 거룩하심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 하신다면 당신의 거룩함이 실추됩니다.” 그가 진정 관여했던 이슈는 인간의 안녕과 보존을 훨씬 뛰어넘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었다.
아브라함의 반박과 노아의 침묵! 아브라함은 역사상 최초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지금 인류는 이런 사람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오늘 하나님은 이런 기도의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