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국의 유명 목회자가 집필한 <생사를 건 교회개혁> 이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세워진 기관이지만 인간이 모이는 기관이기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근원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생사’를 걸어야 할 정도로 교회가 빗나가 있다면 생각만 해도 슬프다. ‘생사’를 걸지 않으면 개혁할 수 없는 교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용기가 없는 사람은 결코 교회를 바로잡아가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특정 사건과 상황, 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독대하여 직면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올해 개신교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루터의 초상화에 나타난 꽉 다문 입술, 넓은 턱, 거의 무표정한 얼굴 등은 루터가 가졌던 용기를 잘 보여준다. 무모할 정도의 용기가 루터에게 없었다면 그는 결코 가톨릭교회의 수장과 맞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용기의 결과는 유럽과 서양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언제 들어도 통쾌하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던 9척 장신 적장 골리앗을 향해 믿음의 물맷돌을 날렸던 다윗! 과연 이 싸움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에게 이 싸움은 ‘생사’를 걸었던 싸움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 싸움을 위해 다섯 개의 물맷돌을 집어 들었다(삼상 17:40). 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처음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돌을 던지기 위해 5개의 돌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시각은 삼하 22:15-22을 통해 다섯 개의 물맷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4명의 골리앗과 같은 블레셋 장수를 언급하고 있다—이스비브놉, 삽,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 또 다른 키 큰 자. 어쩌면 다윗은 이들을 모두 자기가 제거하겠다고 생각해서 다섯 개의 물맷돌을 집어 들었을 수도 있다. 만일 후자가 사실이라면 골리앗과의 대면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리더는 계속해서 사람과 사건을 독대 직면하여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아내는 자신이 일하는 부서의 매니저로 일을 한다. 매니저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는 종종 자기 부서의 직원들과 독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주문해야한다. 직장 동료의 문제점을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지적하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워낙 잘하기 때문에 한번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타인을 바로 잡기 위해 독대하여 질책하는 것이 쉽소?”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결코 쉽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 중 가장하기 싫은 일이 그 일이에요. 단지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뿐입니다.”

타인을 대면하면서 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용기가 없는 리더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용기와 정직함을 요구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리더가 자기 자신을 직시하여 자신의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다. 혁명세력과 결탁하여 국가를 분열시킨 후 정권을 잡은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거친 사람인가는 추측이 가능하다. 분열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던 여러보암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외쳤던 유다의 한 선지자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용기 있는 리더였다(왕상 13:1-10).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는 경계의 끊을 늦추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받은 그가 이 노 선지자가 천사로부터 받았다는 말씀의 진정성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리더는 항상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한다.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여 고쳐나가는 용기—이것이 없으면 개인의 리더십은 개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