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탄이 성큼 다가왔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새벽,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다달았다. 당연히 왕가에 태어났으리라 가정했는지 그들은 예루살렘 헤롯궁을 찾았던 것 같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이야기를 듣고 소동 하였다.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권력은 그 속성 상 자식과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을 법한 곳을 물어보았을 때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6).
여기에 “베들레헴이 작지 아니하다” 는 표현은 반어법이다. 베들레헴은 작고 보잘것 없는 고을이다. 그러나 이 도시에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작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의 원 출처인 미5:2를 보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하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번역인 탈굼은 베들레헴이 작고 겸허한 고을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대 수 천 개의 고을 중 하나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작구나 . . . .”
작으나 작지 않은 것이 기독교의 힘이다. 메시아는 작은 마을, 겸손한 마음에 찾아 오셨다. 작고 보잘것 없는 고을 베들레헴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들레헴으로 변화된 이유는 베들레헴에 경제개발이 일어나 소도시가 거대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베들레헴은 여전히 작고 겸손한 마을 일 뿐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그 곳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외소한 무명의 도시가 아니다. 우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 어느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독교의 메시지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이다. 교회가 부요해졌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관을 붙들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메시지와 기도를 들어보면 한국 교회가 진정 붙들고 있는 것은 세속의 가치이다. 한국교회의 최고 가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공과 돈이다. 개인과 교회, 나아가 국가를 축복하여 부요하게 만들어 주는 메시아! 번영신학의 자기현현이다. 부와 명예를 축적한 교회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좋은 교회(?) 에 가기 위해 학력과 경력을 위조하는 목회자도 있다. 부요를 향한 교회의 열망은 교회를 세속화 시켰다. 아쉬웁게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딤전 6:10) 라는 성경 말씀이 한국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축적한 부가 없는 교회도 별로 나은 것이 없다. 그들의 소망과 기도는 단순히 성장을 통한 부와 명에, 영향력의 축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교회는 심각한 개혁을 필요로 한다. 이 개혁은 교회 지도자의 내면세계가 개혁되지 않는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최근 캄보디아에서 영혼이 새로와지는 경험을 했다. 선교사역을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한 나는 캄보디아 3개 지방에서 온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세미나를 인도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캄보디아 복음주의 연합회 총무는 많은 작업을 했다. 우리가 보낸 자료를 캄보디아어로 번역해야 했고, 세 개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스케줄을 잡아야 했고, 또 수도 프놈펜에 있는 교단 지도자들과의 협의를 통해 지방 지도자들의 모임이 중앙 지도자들의 허가(?) 와 축복 아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또 우리 일행의 공항 픽업부터 며칠에 걸친 시내 구경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였다. 일주일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을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을 때 감사한 마음을 카드에 담아 촌지와 함께 이분에게 건네었다. 카드를 열어 촌지가 담긴 것을 본 이분의 반응은 선교지 지도자들에게서 전혀 본적이 없는 반응이었다. “카드는 기꺼이 받겠으나 이 돈은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사역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일정을 도운 것은 저의 사역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사역했을 뿐이며 이런 일을 하라고 캄보디아 복음주의 연합회로 부터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구지 제가 저의 사역에 대한 또 다른 보상을 받는다면 사람이 주는 축복보다 주님이 주는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뜻은 감사하지만 하나님 종으로서 저는 절대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욕심 없는 그의 깨끗한 영혼은 욕심이 찌든 나의 영혼에 청량제가 되었다. 교회가 가난해지고, 작아 지겠다고 결심하지 않으면 교회에 주님이 머물 자리가 없다. 몇 해전 한국의 유명 목사님이 아들의 사업을 돕기 위해 교회에 손해를 미치면서 아들 사업 자금을 지원했다가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실형은 살지 않았던 사건이 있었다. 그 판결 이후 첫 주일 강단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가난했다면 이런 불미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부자가 된 것이 오히려 화를 자초했습니다.”
베들레헴이 작지 않은 이유는 주님이 오셨기 때문이지 베들레헴 자체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 아니다. 베들레헴이 부를 축적했다면 주님은 그곳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욕심을 버리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의 내면세계에 어떻게 천국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