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다투지 않는 부부가 있던가? 다툼의 시발점은 나의 내년 선교사역 일정이었다. 선교 현장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날짜를 아내에게 제시했을 때 아내는 그 기간 중에는 내가 워싱턴 주립 교도소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한 날짜가 잡혀있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오래 전에 잡아놓은 약속을 우선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내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나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교도소 사역을 주도하는 리더에게 도무지 끌리는 바가 없으니 왠일인지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데는 기쁨이 없소!” 아내는 일격에 반격을 가했다. “That sounds very selfish! 당신이 그 곳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하는 크리스챤 죄수들 때문이지 리더 때문이 아니에요.” 상대방의 좋은 기분을 한 마디 말로 날려버리는데 최고의 기능보유자는 언제나 배우자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아내의 출근 이후 문자 메시지를 보내었다. “사역 일정을 잡기 위한 평범한 대화를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오” 라는 인신공격까지 가지고 가서야 되겠소? 몹시 불쾌하오!” 아내가 보낸 답은 논리적으로 정확했다. “나는 당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적도 당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어요. 단지 당신이 했던 말이 이기적으로 ‘들린다’ 라고 했을뿐이에요.”
문화인류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 (reality) 를 <R> 이라고 표식한다. 그런데 그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인간이 갖은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자신의 안목 만큼 실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인류학은 인간의 안목을 통해 인식된 실재를 <R> 이 아닌 <r> 로 표식한다. 한 개인이 보았던 실재는 <R> 이 아니라 <r> 이다. 오직 신 만이 실재를 <R>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그저 <r> 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완성은 말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느냐에 있기보다 들은 사람이 무슨 말을 들었느냐에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닌 내가 한 말을 상대가 어떻게 이해 했느냐에 있다. 상대가 이해한 말이 내가 한 말과 다르다면 그것은 상대의 청취 실패가 아닌 나의 커뮤니케이션 실패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으며, 바울을 부르셨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주어졌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인간을 부르셨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었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파워풀 했던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 시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그들과 의사소통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제사장, 선지자, 사도들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스런 암호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다. 수 천년 전 고대근동의 문화권에서 선포되었던메시지를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언어와 관습등 큰 문화적 괴리가 있기 때문에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의 하나로 우리는 고대 근동의 언어와 문화 및 사고 방식등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 그 시대의 정황 속에서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과 동일한 메시지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목사님이 한 분 있다. 이분이 깊은 영적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이다. 이분이 성경을 보는 근본 원리는 ‘비밀 암호’ 에 대한 해석이다. 이분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영적비밀의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분의 주장은 우리가 탁월한 영성으로 영적비밀을 볼 수 있는 신비스런 원리를 ‘통달’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분 설교의 대부분은 영적비밀을 해석하는 ‘비밀 시리이즈’ 이다. 이분의 설교 제목 중 아직도 내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삼손 머리털의 비밀’ 이다. 이와같은 성경해석은 제사장, 선지자, 사도들의 메시지를 영적 비밀을 해석할 수 있는 코드를 계시 받은 소수의 영적거장을 제외하고는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커뮤니케이션 대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의사 소통하는 분이 아니시다.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이지 내가 어떤 말을 했느냐가 아니다.
나는 아내의 문자 메시지에 이렇게 응답했다.
영적 지도자인 내가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솔직한 감정을 토로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당신에게 오픈하였소. 그런데 당신에게서 받은 대답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못난 인간인가에 대한 지적이었소. 당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의도적으로 어구를 만들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나의 감정을 토로하지 못한채 비밀을 간직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것이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테지, “나는 그저 당신이 했던 말이 이기적으로 ‘들렸다’ 고 지적했을 뿐 당신이 이기적인 ‘사람’ 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요사이 당신 왜 이렇게 뚱뚱하게 살쪄보이지” 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내가 한 말로 인해 상처입을 것이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나는 한번도 당신이 “뚱뚱하고 살쪘다” 라고 말한 적이 없소. 단지 살쪄 “보인다” 라고 말했을 뿐이오. 우리가 나누는 언어가 파생시킬 ‘감정’ 은 무시한채 오직 언어의 논리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앞으로 많은 것을 당신에게 감추어야 할 것이오.”
아내에게서 온 문자는 명료했다. “You are absolutely correct on this. I am sorry!” 커뮤니케이션 만 잘해도 우리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절반은 예방할 수 있다. 리더는 전략적인 커뮤니케이터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완성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들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