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크라이나 대통령 블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모르는 사람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불과 3주 전만해도 우크라이나인을 제외하고는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을 별로 없었다.  직업 코미디언이었던 젤렌스키는 자신이 만든 시트콤 <국민의 종> 에서 부정부패와 싸우는 젊고, 청렴하고, 개혁적인 대통령 역을 멋지게 소화하여 우크라이나 국민들로 하여금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와 <국민의 종> 출연자들은 인기의 여세를 몰아 <국민의 종> 이라는 정당을 탄생시켰고, 젠렌스키는 압도적 표차로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계의 신인인 젤렌스키가 보여준 대통령의 리더십은 코미디 수준이었다.  이로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이 젤렌스키에 대해 갖게된 실망과 후회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덥친다던가?  이와 같은 리더십 부재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의 표상인 러시아의 푸틴은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인가?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젤렌스키가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서방 언론은 이번 전쟁 중 젤렌스키가 “코미디언 챨리 채플린에서 전쟁영웅 처칠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칼럼에서 젤렌스키의 리더십 중 가장 돗보이는 두가지를 분석하여 목회자요 설교자인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커뮤니케이터와 피커뮤니케이터 간의 상호연결이다.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는 이 연결을 위해 언어와 비언어적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폭격을 맞아 방송국이 불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국민과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다.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영향력”이다.  여기에 구지 하나를 더 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대통령이 국외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나오길 시작했을 때 젤렌스키는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그 소문을 잠식시켰다.  또 자신의 내각과 함께 소셜 미디어에 등장해 아직도 우크라이나의 행정부가 자신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탁월한 리더가 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복잡한 상황이나 이론을 간단 명료하게 정리하여 전달할 수 있는 언어 능력과 비언어적 표현법을 길러야한다.  날카로운 성경의 해석과 웅변적 전달이 위대한 설교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면 끊임없이 자신과 청중을 연결시켜야한다. 일단 청중과 연결되고 나면 설교자가 어떤 말을 해도 청중은 아멘을 연발한다.  그러나 연결에 실패한다면 설교자의 논리과 웅변은 허공을 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커뮤니케이션의 근저는 연결이다.  연결되지 않았으면 커뮤니케이트하지 못했다.  연결되었으면 구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하면 설교자가 청중과 연결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본문 해석능력과 함께 설교자가 꼭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많이 설명했다고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상 말이 간략할수록 연결의 가능성이 올라간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감정이 터치되고 감동이 동반되었을 때 설교자와 청중은 연결된다. 이는 필자가 본 젤렌스키 리더십의 두번째 특징과 연결된다.

둘째, 젤렌스키는 감동의 리더십을 구사하고 있다.  전쟁의 혼돈 속에서 그는 우크라이나인과 유럽의 지도자들을 감동으로 단결시켰고, 포화 속에서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리더십이 무엇인가?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아 동일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다.  통합시킬 수 없다면 리더가 아니다.  분열은 리더십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이다.  전쟁전에는 지리멸멸했던 젤렌스키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지지도가 이제는 91% 를 넘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는 여당도 여당도 없다.  모든 정당과 국민이 젤린스키의 지도력 아래 하나로 뭉쳤다.  젤렌스키는 어떻게 국민을 통합시켰는가?  그가 갖은 용기와 자기 희생이 국민을 감동시켰다.  용기와 희생은 리더십의 기술이 아니다.  인격이다.  다시말해 인격을 개발하지 않으면 리더십을 개발되지 않는다.  리더는 기술자가 되기 이전 인격자가 되어야한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인격!   감동은 사람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자신을 피신시키려는 미국을 향해 “대피용 승용차가 아니라 탄약을 공급해 달라”는 그의 요청은 세계인을 울먹이게 했다.  “대통령은 이미 러시아 저격수의 타켓이 되어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가족은 매일 만나고 계십니까?” 라는 서방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족이 안전한 줄은 알고 있으나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느냐구요.  두렵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국가 존패의 위기 상황에서 죽움을 두려워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발언이다.  이 상황은 작년 8월 텔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입하자 가족을 챙겨 외국으로 피신해 버린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굴욕적 행동과 대비되어 우크라인의 가슴 속에 말할 나위 없는 자신감과 감동, 용기를 주고 있다.  우크라인은 푸틴이라는 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인들의 가슴에 감동과 용기를 심어 주어 그들을 단결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있지 않다.  감동 받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황량하게 된다.  자신의 추종자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 리더는 비로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젤렌스키는 감동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고 있다. 대통령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의 안녕조차 돌보지 않는 젤렌스키의 리더십이야 말로 섬김의 리더십이며 감동의 리더십이다.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정리하여 글로 옮긴다면 한마디로 위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좋아하는 목회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기 원한다면 위기를 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절박한 위기가 리더를 만들어낸다.  개인적, 사회적, 교회적, 국가적 위기야 말로 목회자가 리더십을 발휘하기 가장 적절한 환경이다.  처칠은 2차대전 중 리더로 부상했다.  멕아더, 아이젠하워, 몽고메리는 이차세계대전이 있었기 때문에 오성장군으로의 진급이 가능했다.  레이건이나 데처와 같은 지도자들은 동서 냉전이라는 위기의 산물이다.  아이아코카는 GE가 파산했을 때 리더십의 진가를 들어내었다.  젤렌스키는 전쟁의 위기속에서 세계적인 리더로 급부상했다.

리더는 위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야심을 갖은 리더라면 오히려 위기가 찾아오기를 소망해야 한다.  물론 소망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위기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존 클레먼서와 스티브 엘브레츠는 <세계가 찾는 리더십> 에서 리더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리더란 참신하고 도전적이며 . . . 위험하기까지한 역할이다. . . . 그래서 우리는 리더란 융통성있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해 편히 생각하며 . . . 신중하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알며 근면하고 지치지 않는 일꾼, 때로는 규칙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자기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권한을 주고 이끌며 목표를 설정하는 모험가, 재주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 전달자, 이런 사람들이 바로 리더이다.”

지금 젤렌스키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국가적 위기의 한 복판에서 자신이 갖은 리더십의 진가를 마음껏 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