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 중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목회리더는 언제나 설교자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결여된 설교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언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실제 커뮤니케이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비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말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만 집중해 보고자 한다. 리더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무엇인가? 아니면 아무런 전략이 없이 내가 하는 말을 상대도 동일한 이해와 감정의 선상에서 받아들일 것으로 가정하는가?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자가운전이 막 시작되면서 기발한 차내 사인 (sign) 이 등장했다. “초보운전” 이라는 애교와 겸양을 갖춘 사인이다. 초보 설교자와 베테랑 설교자의 가장 큰 차이라면 설교하기 전 설교자가 갖는 관심이다. 초보 설교자의 관심은 항상 ‘설교의 내용’에 있다. 반면 베테랑 설교자의 관심은 자신의 설교를 들을 청중이다. “무엇을 전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 설교를 들을 청중은 누구인가?”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달라진다.
고대의 본문이 현대 (나아가 포스트모던) 인의 삶에도 얼마나 적확하게 적용되는지 느끼지 못한다면 청중은 경청하지 않는다. 청중이 본문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청중이 처한 삶의 정황이 본문의 사건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청중이 가슴저리도록 동일시 (identify) 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의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솜씨’는 필수불가결한 리더십 요소이다. 1800년대 두 번이나 수상으로 발탁되어 대영제국을 이끌었던 벤자민 디스렐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말로서 다스린다” (Men governs with words).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포스트모던’사회라고 규정한다. 포스트모던 사회가 갖은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과거에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존재나 직함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그 사회는 ‘다양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조가 종교적 측면에서는 ‘종교다원주의’로 표현된다.
바나 연구소가 1994년 발표한 설문에 의하면 미국에서“62% 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교회 교인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설문의 범위를 넓혀 비그리스도인들까지 포함할 경우 약 75% 의 미국인은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며 목회하는 삶의 정황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끌고 가야하는 청중의 적나라한 현주소이다. ‘성직자’라는 직함 하나로 인해 존중 받았으며 단지 목사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나의 말을 믿고 따를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결코 의미있는 리더십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리더’라는 단어 자체가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르는 사람의 ‘현주소’에서 그들과 의사소통 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따라오게 할 수 없다. 이것은 권위를 인정했던 과거에도 어려웠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더욱 어렵다. 이 어려운 일을 전략이 없이 자연스레 접근한다면 어쩌면 커뮤니케이션 실패는 자연스런 결과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실패는 심각한 리더십 실패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류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마1:21).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밖에 없는 인간사회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을 땅의 정황에 성육화 (incarnation) 시키셨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정황에 자신의 삶을 투영 (identify) 할 수 있다. 의미있는 의사소통을 위한 다리가 놓였다.
다윗을 질책했던 선지자 나단, 그는 무작정 하나님의 계시를 내던진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전략을 사용했다. 아무런 전략없이 강력한 제국을 세운 군출신 통치자에게 질책의 검의 휘두르는 것은 만용이며 무지이다. 한 마리의 암양을 자신의 딸 처럼 보살폈으나 비정한 권력형 축재자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련한 목자의 이야기! 나단은 본론을 말하기 전 자신의 청중 (다윗)이 자신을 볼 수 있는 (identify) 준거틀을 제시하였다. 그 이후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가련한 목자의 심정, 비정한 권력자의 심정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이 목자로 살았으며 현재 자신은 권력자로 살고 있다. 언제나 이 이야기는 왕이었으나 선지자의 지적 앞에 통열하게 회개한 ‘다윗의 영성’으로만 조명된다. 아쉬웁게도 이 이야기에 확연히 드러난 나단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좀 처럼 부각되지 않는다. “리더는 말로 다스린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 2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