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아모스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아모스서에 기록된 것이 전부이다. 남왕국 유다 “드고아” 에서 목자로 일하던 중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상’으로 받았다 (1:1). 그 이후 그는 마치 사자가 부르짓듯 자신이 본 이상을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다 (1:2). 그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벧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여로보암왕에게 아모스의 메시지에 대해 이렇게 보고 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7:10). 아마샤는 또 아모스를 향해 이렇게 경고했다.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에서 떡이나 먹으며 거기에서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7:12-13). 아마샤는 아모스를 자신과 동급의 메신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 유다 촌놈 주제에 제국의 수도 사마라아에서 말씀을 전하는가? 고향에 돌아가 월급 받으면서 (떡이나 먹으면서) 목회하라. 결국 너는 사례비 때문에 말씀 전하는 삯군이 아닌가?
이에 대한 아모스의 대답은 간결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암 7:14-16). 무슨 말인가? 아모스는 자신이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선지자의 아들) 전문 설교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는 신학교육이나 사례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했기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지어다” 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라고 아마샤에게 도전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주님의 메신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들이 전했던 말씀의 권위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출4:22; 수7:12; 삿6:9; 삼상2:27; 삼하 7:8; 왕상 11:31; 왕하 1:16; 대상 17:4; 대하 12:5; 사7:7 외 다수).
메시지가 중요한가 메신저가 중요한가? 단연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메시지가 없다면 메신저는 존재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여기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부르셨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거듭 제시하면서 순종하기를 거부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4:12). 모세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세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동 업로드 되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은 진정 자신의 말씀을 메신저에게 가르치신다. 반면 메신저가 남다른 노력으로 그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지 않으면 자동소총에서 총알이 발사되듯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강력한 메시지가 저절로 발사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발사되는 것은 공허한 헛소리 밖에 없다.
아모스는 8세기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도덕적 타락의 이유 중 하나는 유한 마담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갑질을 하기 때문이며 또 남편들에게 계속 바가지를 긁어 더 큰 쾌락을 맛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4:1b). 이때 그가 사용한 이스라엘 유한 마담들에 대한 은유는 듣는 이의 숨을 멈추게 한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4:1a). 풍요로운 목초지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고 살이 피둥피둥찐 욕심장이 암소들! 이들은 자신들의 배는 양껏 채웠지만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모스가 이렇게 남다른 비유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목자로 일했던 때에 축적해 두었던 가축에 대한 그의 전문지식 때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동시대에 사역했던 호세아는 어떠했는가? 아모스와는 달리 호세아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가 훌륭한 식견을 갖은 상류계층의 사람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호세아의 메시지 속에서 보이는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이스라엘의 과거사에 대한 지식, 또 뛰어난 문학적 표현력 때문이다. 혹자는 이사야서를 구약의 로마서라고 부른다. 이 말은 신약시대 최고 지성이 바울이라면 구약시대 최고 지성은 이사야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사야는 아마샤 왕의 생질이며 웃시야 왕의 사촌이다. 성골 중의 성골인 샘이다. 그가 아하스 왕이나 제사장 우리야를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 (7:4; 8:2) 을 보면 이사야의 출신 성분에 대한 탈무드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전했던 탁월한 메시지는 그의 높은 교육수준과 폭넓은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와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예레미야를 대적하였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는니라” (렘28:4). 유다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아와는 달리 하나냐는 바벨론에 볼모가 된 유다의 왕과 포로들이 머지않아 고향에 돌아오고 유다가 회복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언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역사를 진행시키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냐는 거짓선지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하나냐는 자신이 거짓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알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인기를 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하나냐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철저히 믿고 자신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선포했으나 결과가 참담했을 뿐인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조건부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종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5-6). 시내산 언약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모압언약이 기록된 신명기의 신학은 간결하다. <순종하면 축복이 불순종하면 저주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반면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진 다윗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다. 순종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윗의 왕권은 영원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다 (삼하7:11b-17). 그렇다면 두 선지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어느 신학에 근거하여 선포하였는가가 자명해진다. 예레미야는 시내산 언약에, 하나냐는 다윗언약에 근거하여 메시지를 전했다. 둘 다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정통 신학이다. 문제는 두 선지자가 갖은 시대를 보는 눈이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야 말로 시내산 메시지가 적용되어야할 시대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반면 하나냐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는 다윗언약의 신학을 강력하게 증거하여야 할 시대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읽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거짓선지자가 되고 말았다.
메신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얼마만큼 볼 수 있는가? 정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눈이 만들어진 만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메시지가 중요한가 메신저가 중요한가? 메시지가 없다면 메신저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메신저의 질에 따라 메시지가 들어나기도 사장되기도 한다. 메시지는 이미 주어졌고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시지가 선포되는 삶의 정황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눈이 메신저에게 없다면 그는 변함없는 주님의 메시지를 한 시대에 극명하게 들어내는데 실패하고 말것이다. 그 결과 메시지는 진부해지고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 시대의 사람들이 메시지를 거부하는 이유는 메신저에게 식상했기 때문이다. 메시지인가 메신저인가? 이론상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메신저의 개발없이 메시지의 극대화는 없다. 신학교수인 나에게 최고의 성경공부 및 제자훈련 교재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목회자들에게 항상 내가 아는 최고의 교재를 소개하면서 나혼자 읍조린 말이있다. “그 교재를 사용해서 교육해도 교회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겁니다. 교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를 개발하는 것이니까요.” 최고의 주석도 설교자가 먼저 개발되지 않는다면 설교 준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